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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북부리 팽나무』천연기념물 30일 지정 예고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팽나무, 마을, 낙동강, 평야일원 팽나무에서 남동쪽으로 펼쳐진 평야 지대 (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24일 서울 종로구 소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제7차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회에서 창원시 보호수인「창원 북부리 팽나무(’15. 7. 16.지정)」를 오는 30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기로 했다.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소덕동 팽나무’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화제가 된 나무이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범국민적 관심을 반영하여,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천연기념물의 지정가치를 판단하고자 지난 달 29일 식물과 전통조경 분야의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 3명과 함께 지정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팽나무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포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패구나무’라고도 불리었으며, 열매는 철새들의 먹잇감이 되고 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크게 자라 그늘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당산나무이다.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이러한 생육 특성을 잘 보여주고,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 동부마을 지역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지금까지 천연기념물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는 예천 금남리 황목근(팽나무)과 고창 수동리 팽나무 단 2건 뿐이다. * 당산(堂山) 나무: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수령 약 500년, 나무높이 16m, 가슴둘레 6.8m, 수관폭(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린 최대 폭)이 27m로, 기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예천 금남리와 고창 수동리의 팽나무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줄기의 윗부분인 수관이 넓게 펼쳐지는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또한, 팽나무가 위치한 언덕에서 낙동강을 경계로 북쪽에는 하남읍, 남쪽에는 대산면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고, 동산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지대에 우뚝 선 모습이 장관을 이뤄 독특한 경관적 가치 또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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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팽나무 실제 천연기념물 지정조사창원 북부리 팽나무(보호수). 사진제공 : 문화재청 (국민문화신문) 유에스더 기자 =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최근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8회에 등장한 창원 북부리 팽나무(보호수)에 대한 실제 문화재적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천연기념물 지정조사를 하기로 했다. 드라마에 실제로 등장한 창원 북부리 팽나무(창원시 보호수)는 주변이 탁 트인 마을 산정에 우뚝 서 있으며, 수령은 약 500년 정도, 수고(나무 높이)는 16m, 가슴둘레 6.8m, 수관폭(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린 최대 폭)이 27m 정도로, 팽나무 중 비교적 크고 오래된 나무에 속한다. 드라마속에서 이 팽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노거수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위기로부터 마을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팽나무는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하며 중남부지방에 주로 사는 장수목으로, 마을의 대표적인 당산나무 중 하나이며, 현재, 천연기념물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는 예천 금남리 황목근(팽나무)과 고창 수동리 팽나무 단 2건 뿐이다. 문화재청은 조만간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 등과 함께 이 나무의 역사와 생육상태 등 문화재적 가치를 현장 조사할 예정이며, 마을 주민과 지자체와 함께 천연기념물 지정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창원 북부리 팽나무(보호수). 사진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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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오랜 세월 진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아 온 진주성(晉州城ㆍ사적 제118호)은 서남쪽에서 동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따라 높이 5∼8m, 길이 1천760m의 성곽을 두르고 있는 자그마한 성이다. 어둠이 깔리면 진주성과 촉석루는 황홀한 야경을 보여준다. [사진/전수영 기자]현재 역사공원으로 꾸며진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처음 건립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이후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인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했다. 이어 선조 24년(1591)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외성을 쌓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해 10월 진주성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3천800여 명의 군사로 2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은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덟 달 뒤인 1593년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민ㆍ관ㆍ군 7만여 명이 왜구에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장렬하게 순절했고 진주성은 함락됐다. 왜군은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 와중에 의기 논개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진주성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이 벌어졌던 격전지로 역사 현장학습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며 “진주를 일컬어 약무진주 시무호남(若無晋州 是無湖南)이라고 말하듯 진주는 예로부터 남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말한다.진주대첩이 벌어졌던 혈전의 현장인 진주성은 임란 이후 경상도 우병영이 위치했고, 해방 이후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행정기관이 소재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살았는데 1979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 지금의 역사공원으로 조성됐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창렬사, 북장대, 서장대 등 진주성 전투를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픈 역사를 품은 진주성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에 3회 연속 선정됐다. 촉석루는 미국의 뉴스 전문채널 CNN이 선정한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공북문과 김시민 장군 동상◇ 왜적과 맞섰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拱北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잘 꾸며진 잔디공원과 김시민(金時敏ㆍ1554∼1592)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북문은 ‘북쪽에 있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告由)하던 자리로 알려졌다.2000년 1월 1일 제막한 김시민 장군 동상은 높이 7m로 진주성 수호상이다. 시호는 충무(忠武)로 이순신 장군과 같다. 동상 앞 비석에는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군기시 판관을 거쳐 1591년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ㆍ고성ㆍ진해ㆍ지례ㆍ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천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순절하였다. 슬프다! 장군의 천수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해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라고 적혀 있다. 김시민 장군 동상을 둘러본 뒤 성곽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면 김시민 장군 전공비(경남 유형문화재 제1호)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워진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ㆍ경남 유형문화재 제2호)를 만난다. 옆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7만 민ㆍ관ㆍ군의 넋을 기리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세워져 있다. 촉석루는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어우러져 천하의 전경을 연출한다.임진대첩계사순의단에서 남강 쪽으로 내려가면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히는 촉석루(矗石樓ㆍ경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가 서 있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된 이래 수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한 촉석루는 ‘강 가운데 우뚝 솟아있다’는 의미로 ‘촉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쓰였고 평시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로 과거를 치르던 고사장으로도 사용됐다. 임진왜란 때 불탄 촉석루는 1948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으나 6.25 한국전쟁 때도 불타는 불운을 겪은 뒤 1960년에 복원됐다.촉석루에 오르면 ‘북에 평양 부벽루가 있다면 남에는 진주 촉석루가 있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 옛날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의암, 강너머 드넓은 모래사장, 초록빛 산과 탁 트인 하늘이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 문인 이인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손꼽히는 ‘파한집’에서 “진주의 산수(山水)가 영남 제일”이라고 말했다.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촉석루에는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청천 신유한, 매천 황현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데 너무 높이 걸려 있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논개의 충절이 서린 의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촉석루에서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암(義巖ㆍ경남 기념물 제235호)이라는 바위가 반긴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남강 수면 위에 솟아있는 바위 서쪽 면에는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쓴 ‘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논개가 낙화(落花)한 곳이라서 그런지 촉석루를 떠받치는 벼랑 만큼이나 크고 당당하게 느껴진다. 의암 바로 위에 세워져 있는 의암사적비에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라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촉석루 옆에는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ㆍ경남 문화재자료 제7호)가 있다.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과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 있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미모와 기예가 모두 뛰어난 진주기생 산홍은 내부대신이며 친일 앞잡이인 이지용이 첩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촉석루보다 높은 지역에 있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서장대◇ 불빛과 물이 어우러진 황홀한 야경 의기사 바로 옆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ㆍ경남 유형문화재 제3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 순국한 성주목사 제말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흥록 장군의 충의를 새긴 비석이다. 쌍충사적비를 지나 성곽을 따라가면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서장대((西將臺ㆍ경남 문화재자료 제6호)가 나온다. 절벽 위에 위치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지휘소로 남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회룡루(回龍樓)로 나오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이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1934년 한 독지가에 의해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 집이다.서장대 아래 위치한 호국사(護國寺)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였으며, 창렬사(彰烈祠ㆍ경남 문화재자료 제5호)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충민사에 모셔져 있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38명의 신위를 모신 사액(賜額) 사당이다. 사당 내에는 임금이 지어 내린 제문의 비각이 있다. 선조 40년에 건립된 사액사당인 창령사 창렬사를 나와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천자총통ㆍ지자총통ㆍ현자총통이 설치된 포루를 만난다. 진주성 내성에는 3곳, 외성에는 9곳 등 총 12좌가 있었으나, 상징적으로 한 곳만 복원했다.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하나로 붙어있는 연리나무를 지나면 북쪽 지휘소인 북장대(北將臺ㆍ경남 문화재자료 제4호)에 닿는다. 진주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성내는 물론 외성의 군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부르는 북장대에 오르면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북장대에서 성벽을 따라가면 공북문이고, 성 중심부로 내려오면 조선 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인 영남포정사(경남 문화재자료 제3호)가 눈에 띈다. 문루 앞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표석인 하마비가 있다.진주성 내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인 진주국립박물관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임진왜란실은 전쟁의 발발, 일본군 전략, 조선의 대응(의병과 수군의 활약), 명군의 참전, 정유재란과 종전 등의 주제로 나누어 전쟁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 김시민선무공신교서(보물 제1476호), 천자총통(보물 제647호) 등 다양한 유물 관람은 물론 진주성의 역사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진주국립박물관 내 임진왜란실 진주성의 또 다른 매력은 야경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주성 건너편 중앙광장에 서면 진주성벽과 촉석루는 화사한 불빛을 받아 황홀한 경치를 보여준다. 바람에 일렁이는 남강 물결 너머 촉석루의 처마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조명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성안으로 들어가 은은한 불빛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왜적과 맞섰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 천지사방이 적요했고 남강의 물결은 더없이 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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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동 옛 대구기상대 부지, 휴게 ․ 문화공원으로 조성올해 3월 착수한 공원조성계획을 지난 11월 결정고시했으며, 보상이 내년 상반기까지 마무리되면, 내년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철거와 공사를 진행하여 2019년 6월경에 공사를 완료할 예정이다.신암동 옛 대구기상대부지는 2013년 9월 효목동으로 대구기상지청이 옮겨가면서, 현재는 지역주민을 위한 휴게․건강증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기존 관측기기를 활용한 비교 관측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새롭게 조성되는 기상대기념공원은 크게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된다.첫째, 역사마당구역은 현재 관측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기상관측시설 주변을 24절기를 상징하는 12구역으로 나누고, 공원이용자(학생)들이 우리나라 전통기상관측기구를 확인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옛 기상조형물을 모형화하여 배치한다.둘째, 물의 정원구역은 상단부에 미세물분자가 분사되는 바닥분수광장을 조성하여 주변의 평화시장 치맥페스티벌과 연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셋째, 바람의 언덕구역에는 기상대부지의 특성인 진입도로와의 경사차로 인해 조성하는 조형옹벽 위에 바람개비를 설치하고, 전면에는 상징물을 설치해 입구이미지를 부각할 예정이며, 하절기 폭염대응시설인 쿨링포그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넷째, 건강마당구역에는 기존 운동시설물을 이설하여 지역주민들의 운동공간으로 활용하며, 운동시설물 주변에는 원형플랜트를 설치하고, 정자목으로 많이 쓰이는 팽나무를 식재해 옛 정취를 불러일으킬 예정이다.그 밖에도 도로의 기존 옹벽을 이용하여 날씨를 주제로 한 벽화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대구시 김광철 도시재창조국장은 “구 기상대부지와 주변 노후불량주거지 일원이 주민들의 안식처이자 휴게공간인 기상대기념공원으로 재탄생된다”면서, “평화시장 닭똥집골목과 연계하여 지역의 명소로 조성되면 현재 완료단계에 있는 생활문화가로 조성사업과 함께 신암재정비촉진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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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숨비소리 길'에서 해녀 숨결 느끼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될 제주해녀문화 곳곳 산재 제주 바닷가에는 휘파람이 끊이지 않는다. 휘파람이 들려오는 곳에는 어김없이 해녀가 있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소리'다.숨비소리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해서 나오는 동안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소리다. 심연에서 내오는 애절하고도 원초적인 소리다.여행자에겐 언뜻 새소리처럼 들리는 숨비소리엔 해녀들의 삶이 녹아 있다.해산물 채취하고 올라오는 해녀(제주=연합뉴스) 제주 해녀가 깊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뒤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2016.11.26 [제주해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숨비소리 길' 걷기 지난 22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해진 제주해녀문화를 엿볼 수 있는 '숨비소리 길'을 찾았다.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출발했다. 박물관을 왼쪽에 끼고 동쪽으로 넘어가 세화축구장을 지나자 제일 먼저 '삼싱당'이 눈에 들어왔다.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삼싱당은 '여씨할망당'이라고도 한다. 세화리 면수동 마을 한가운데 있는 나지막한 동산인 '금산'에 있다고 해서 '금산당'이라고도 부른다.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들어 '여씨할망신위'를 모셨다고 한다.이 마을 해녀를 비롯한 주민은 정월 12일 대제, 2월 12 영등맞이, 7월 12일 백중맞이, 10월 12일 시만국대제를 각각 지내며 각 가정의 무사안년을 기원한다.삼싱당에서 나와 제법 큰 팽나무들이 있는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다시 올레 21코스 표시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이웃 마을인 하도리의 별방진까지 가는 약 2㎞의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그리 넓지 않은 무밭들이 쭉 펼쳐졌다.해녀들의 안전 조업을 빌었던 삼싱당(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제주해녀박물관 인근에 있는 삼싱당. 해녀와 마을 주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당이다. 2016.11.26 khc@yna.co.kr 물때가 맞을 때는 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물질하지 않는 날에는 밭에서 농사를 짓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삶을 사는 해녀들의 모습이 그려졌다.별방진(別防鎭)은 조선시대 군사진영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다. 중종 5년(1510)에 제주목사 장림이 성을 쌓고 김녕읍에 있던 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고 지었다. 하도리보다 더 동쪽에 있는 우도를 근거지로 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성의 총 길이는 1천8m이고, 높이는 3.5m다.남쪽 성벽 위로 올라가니 성 안팎의 집들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마을을 지나 북동쪽 성벽으로 올라갔다. 하도리 포구에 세워놓은 'Hado'라는 영어로 된 하얀색 구조물이 눈길을 끌었다. 성벽 밖 바로 밑에는 옛 주민들이 먹었을 맑은 용천수도 보였다.왜적의 침입을 막았던 별방진(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해안에 쌓은 별방진 성벽. 2016.11.26 khc@yna.co.kr 마침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라 바닷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얼른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와 해안도로를 따라 서문동 해안가의 원담을 보러 갔지만 아쉽게도 바닷물이 너무 많이 들어 볼 수 없었다. 원담은 밀물 때 들어왔던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잡으려고 해안가 얕은 바다에 원형으로 쌓은 돌담이다.깊게 눌러 쓴 모자도 날아갈 것 같은 북서풍을 가르며 서동 불턱을 찾았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다. 옛날 같으면 주변 나뭇가지 등을 주워다가 불을 피워 몸을 덥히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해녀들을 볼 수 있으련만 지금은 추억의 장소가 됐다. 현재는 어촌계마다 탈의실과 보일러가 있는 욕실, 작업장 등을 갖춘 현대식 해녀탈의장을 갖추고 있다.서동 불턱 인근에는 '환해장성(環海長城)'이 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과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 해안선 300여리(약 120㎞)에 쌓았다고 전해진다.해녀들의 쉼터 불턱(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 해녀들이 불턱에 모여 앉아 담소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6.11.26 <<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주변에는 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공기에 닿아 굳으면서 생긴 '튜물러스(Tumulus)'란 용암지형과 산림청 보호식물로 지정된 '모새달'이란 식물, 피부의 염증성 질환과 피부 병원균 생장 억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염생식물 '큰비쑥' 등이 보였다.이 길에 있는 유일한 절인 용문사와 면수동 주민의 옛 식수였던 '만물'을 지나 이내 해녀박물관에 도착했다. 길이가 4.4㎞로 1시간 30분 걸린다지만 2시간이 걸렸다.박물관 1층 카운터에서 표를 끊고 해녀의 삶을 다룬 제1전시실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제주 초가와 부엌, 밥상은 물론 식수를 길러 다닐 때 사용했던 허벅, 차롱, 애기구덕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둘러봤다.해녀의 일터를 보여주는 2층 제2전시실에서는 해녀들이 불턱에 모여 앉아 담소하는 모습을 재연한 전시물과 물질하는 하는 영상, 물질 때 사용하는 물안경, 비창, 까꾸리, 작살, 테왁 등이 눈길을 끌었다. 옛 해녀들이 입었던 광목으로 만든 '물소중이'와 현재의 잠수복인 고무슈트도 대비해 놓아 해녀 의복의 변천사를 가늠케 했다. 해녀 공동체와 공동체 내의 위계질서에 대한 설명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3층 전망대에 올라서니 세화리 마을과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2층에서 1층 제3전시실로 내려오는 통로에는 옛 제주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때의 명칭과 바람의 명칭,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과 채취 시기 등에 설명이 붙어있다. 해녀의 생애를 다룬 1층 제3전시실에선 해녀들이 직접 들려주는 삶의 기억을 담은 영상물들을 시청했다.어린이해녀관은 '제주해녀 수애기'의 이야기를 다룬 3D 애니메이션, 어린이 숨 참기, 망사리 시소와 저울, 재미있는 고망낚시, 해양쓰레기 등을 보여준다.제주해녀박물관 전경(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전경. 2016.11.26 khc@yna.co.kr 숨비소리 길은 제주 해녀문화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길이다. 마침 겨울이어서 해녀를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박물관이 있어 아무 때나 와도 해녀문화를 살펴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날은 거의 저물었다. 오후 2시 50분께 도착해서 숨비소리 길을 걷고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됐다.제주해녀문화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리는 제11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 간 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될 예정이다.◇ 교통편·탐방시간·주변 관광지·먹을거리 제주공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세화·성산 방면 701번 시외버스를 타고 달리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면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자가용으로는 제주공항에서 출발해 1시간 정도면 도착한다.제주해녀박물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다만 관람 시간을 고려해 오후 5시 10분까지 표를 끊어야 한다. 숨비소리 길은 정해진 탐방시간이 없으므로 아무 때나 걸어볼 수 있다.주변 관광지로는 비자림과 돌 미로 공원인 메이즈랜드, 나무 미로 공원인 김녕미로공원, 만장굴, 제주레일바이크, 성산일출봉 등이 있다. 제주해녀박물관 주변에 나름대로 특색을 살린 카페, 식당, 횟집, 민박들이 줄지어 있다. 10분 거리에 세화민속오일장도 있다. 세화민속오일장은 끝자리가 '0'이거나 '5'인 날에 열린다.